[홍대스트리트북스] 뭐, 그냥 그렇다고요.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루비 엘리엇 글 그림 | 나윤희 옮김 | 종이섬
북디자이너 강은영
mdbiz@newsbalance.co.kr | 2026-06-03 00:05:19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북디자이너 강은영] 작은 도서관 서가를 서성이다 흰 표지인데 손때가 도드라진 작은 책에 눈길이 갔다.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헝클어진 듯한 일러스트와 글자, 면지도 없는 페이퍼백 형태. 파란색으로만 인쇄된 책. 뒷표지를 사랑하는 나는 서둘러 뒷표지를 살폈다.
‘나의 조각을 천천히 충분히 긁어 모아 다시 떼어 붙여 나를 고정하고, 나 자신의 맥락을 맞추고, 나라는 사람으로 바깥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 일은 늘 힘들었다. (…) 무섭긴 해도 오늘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전진할 수 있다. 나는 내 궤도를 가고 있으며 나는 괜찮다.’ (뒷표지)
이 책은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루비 앨리엇이 쓴 그림 에세이다. 저자는 우울증, 섭식장애 등 정신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가며 겪은 일상을 유머와 엉뚱함으로 풀어냈다.
우울증 하면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는 얼굴이 있다. 어둡고 무너진 무기력한 사람. 그러나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늘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주변 시선 때문에 말하지 못하거나, 표현해도 돌아오는 말은 상처뿐이라 일부러 감춘다. 심지어 본인조차 정신적, 정서적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고기능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는 정도니까.
루비 앨리엇은 그저 자기 상태를 말한다. 뭉글뭉글하고, 축축하고, 미끄덩하고, 무거운 가운데 느닷없는 위트가 튀어 오른다. 우울증이나 낮은 자존감 같은 주제를 억지 신파 없이 덤덤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 순간순간 실소가 흐른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도 괜찮다는 위로를 던진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덮고, 곁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주문창을 열었다. 2018년 출간한 이 책은 이미 절판. 더해서 한 책 소개 인플루언서가 본인의 안전지대 같은 책으로 추천하면서 구하기 더 어려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기에 힘입어 2026년 재출간했다. 역시 인플루언서의 힘은 크다. 재출간을 하게 하다니.
재출간 과정에서 책 장정이 바뀌었는데 이전 출간본보다 너무 매끈해진 탓일까? 내용에 어울리는 물성은 이전 출간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련되고 갖춰진 느낌은 유려하고 온전해 보이지만, 물성이 바뀌면서 이전 출간본에서 느꼈던 감정이 사라져 다소 아쉽다.
그리하여 나는 어렵게 웃돈을 주고 이전 출간본을 샀다.
근래에 마음 챙김, 명상, 나를 향하는 것들이 다시 주목받는다. 예전에 대세였던 ‘힐링’과 다소 다른 양상이다. 빠른 세상에 점점 지쳐가고 힘들어지고, 혼자인 것 같고, 자꾸만 아픈 것 같다. 모두가 모르게 시들어가는 느낌이 드는 요즘이다.
한 소설가의 말을 인용하며 끝을 맺어본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라는 제목이 별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은영. ‘표1’보다 ‘표4’를 좋아하는 북디자이너. 인스타그램 디자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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