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스트리트북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밑줄 긋는 남자│저자: 카롤린 봉그랑│역자: 이세욱│열린책들

번역가 조민영

mdbiz@newsbalance.co.kr | 2026-02-25 00:05:06

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번역가 조민영] 어떤 독서는 단순히 이야기를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를 다른 책으로 안내하고, 미지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는 내게 그런 책이다. 

 

소설 주인공 콩스탕스는 프랑스어로 ‘변함없음(constance)’이라는 이름 뜻처럼 한 남자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바친다. 다만 그 남자가 현실 속 인물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라는 게 문제다.

 

그는 바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유일하게 공쿠르상을 두 번 받은 작가 로맹 가리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받은 공쿠르상은 매년 그해 가장 우수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프랑스어 산문 소설에 수여한다. 

 

콩스탕스는 일방적인 짝사랑 끝에 잠시 다른 작가에게 관심을 가져보기로 하고 도서관을 찾는다. 그러나 로맹 가리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쉽지 않다. 빌려온 책을 읽는 둥 마는 둥둥 글줄을 걸러뛰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 폴리냐크의 <오렌지빛> 76페이지 위쪽 여백에 연필로 적힌 이 말을 발견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콩스탕스와 ‘밑줄 긋는 남자’의 가슴 떨리는 첫 대면이다. 외로움에 사무친 스물다섯 콩스탕스는 그때부터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이 책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걸까? 그 ‘당신’은 누구일까? 누구든 그 글을 읽는 사람? 아니면 나? 나를 모르면서 누가 나에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21쪽)

 

밑줄 긋는 남자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음에 읽을 책을 추천한다. 그렇게 로맹 가리 세계에 갇혀 있던 콩스탕스를 또 다른 문학 세계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에서 로제 니미에의 <이방의 여인>까지, 온통 사랑을 고백하는 문장에 그가 그은 밑줄은 콩스탕스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이후 콩스탕스는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한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키르케고르 <유혹자의 일기>를 발견한다. 콩스탕스는 이 책에서 그가 그은 밑줄에 자신이 그은 밑줄로 응답하며, 그의 독백을 둘만의 대화로 바꿔나간다. 

 

“대화 속에서 그는 살아 숨 쉬었다. 어찌나 실감이 났던지 나는 밑줄 긋는 남자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책 덕분에 내 삶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99쪽)

 

물론 이 모든 건 콩스탕스의 상상이다. 밑줄을 그은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현실 세계에선 절대 낭만으로 포장할 수 없는 이 공공 재산 훼손 행위가 동일인 소행인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콩스탕스와 함께 설렜고, 밑줄 긋는 남자가 권해준 책을 손이 닿는 한 구해 읽었다. 또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한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마지막 페이지를 슬쩍 들춰보기도 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은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글을 쓰고 번역하며 일종의 밑줄 긋는 일을 하고 있다. 고심하여 옮긴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징검다리가 되고, 당신에게 더 좋은 것을 권하는 따뜻한 응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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