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
![]() |
많은 이들이 감정과 상황을 “대박” “진짜” “헐” 같은 단순한 단어로 표현할수록, 사실은 이보다도 적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대한 경험은 깊어지고, 삶의 스펙트럼은 분명 넓어진다. 반면, 내 입과 손끝에서 나오는 단어의 가짓수는 점점 줄어만 간다. 감정은 세월의 무게만큼 복잡하고 미묘해지는데, 이를 표현할 언어는 오히려 단순해진 느낌이다. 주로 사용하는 표현의 단순함과 얕은 깊이가 느껴질 때면 부끄럽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여태껏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돌거나 도태되었다는 기분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 과거에 썼던 글을 들춰 보고는 흠칫 놀란다. ‘내가 이런 멋진 표현을 썼다고?’, ‘이렇게 고급 어휘를 사용할 줄 알았다고?’ 빛바랜 문장 속에서 지금보다 훨씬 풍요로운 언어를 구사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할 때면 묘한 기분이 된다.
도대체 과거의 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빈약하고 메마른 언어만 내뱉는 현재 자신에게 실망하던 중, 이 책을 만났다. 신효원 작가의 <우리가 사랑한 단어들>.
이 책은 그야말로 ‘단어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온 마음을 눌러 담아 만든 정성스러운 안내서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기억 속에서 방치해 두었던 단어의 의미를 짚어주며, 그 속에 담긴 따스한 숨결을 하나하나 복원해 낸다.
“어른이 되어서도 단어들을 남몰래 오물거립니다. 그 단어들은 떨고 있는 제 등 뒤에서 담요를 덮어 주기도 했고, 끝 모르게 달아나 버린 마음에는 밝은 곳으로 가 보자고 손을 잡아 주기도 했어요. 초여름 여린 잎들이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사락사락’ 하고 중얼거리다 뭉클해진 어느 날의 마음도 기억합니다. ‘사락사락’이란 단어 하나에 보지 못한 여린 잎이, 느끼지 못한 바람결이, 잊고 지낸 저 자신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았어요. 우리가 모두 지금, 여기 있었다고요.”
작가 말처럼, 단어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그저 입안에서 조용히 굴리기만 해도 잊고 지낸 나 자신을 깨우고, 지친 마음을 다정하게 위로해 주는 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타성에 젖어 메말라 가던 우리의 언어 감각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줄임말과 신조어, 외래어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이 시대 속에서 저자가 조심스럽게 꺼내어 놓은 단어가 순우리말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눈치채셨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 책에 소개된 단어들은 모두 순우리말입니다. 서문 시작에서부터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건 ‘순우리말’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어떤 거리감 때문이었어요. 순우리말은 어쩐지 세련된 맛이 없는 것 같고, 특별한 사람들만 꺼내 볼 것 같고, 예쁘긴 하지만 내가 쓸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용기 내어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합니다. 줄임말, 신조어, 외래어 등이 널리 퍼지고 있는 요즘, 순우리말이 그 거리감을 넘어 얼마나 선명하고 감각적으로 세계를 그려 내는지 여러분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제 삶 곳곳을 스쳐 간 순우리말의 생명력과 온기가 여러분에게도 가 닿을 거라는 바람과 함께요.”
저자의 이러한 고백처럼, 우리는 순우리말을 교과서 속 유물이나 국어사전 속에나 존재하는 낯선 언어로 치부해 왔을지도 모른다. 영어 단어 하나를 더 외우는 일에 열을 올리면서도, 우리 삶을 지탱해 온 모국어 깊이에는 무심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단어는 놀라울 정도로 입체적이며 선명하고 감각적이다. 언어가 좁아지며 함께 협소해졌던 나의 세계가, 단어 확장과 함께 다시금 넓어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아쉬운 점은 존재한다. 새로운 단어가 너무 한 번에 많이 나온다. 아무리 좋은 약도 과하면 탈이 나는 법. 물밀듯이 밀려드는 단어가 가끔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 책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해치우듯 읽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끊어 읽기를 권한다. 단어가 당신 마음에 완전히 스며들 시간을 주는 게 좋다.
![]() |
|박단비. 종이책을 사랑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부동산 이슈로 e북을 더 많이 사보고 있다. 물론 예쁜 표지의 책은 여전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 뉴스밸런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