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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
단 하루도 정치를 해 본 적이 없는 37세 젊은이다.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 여론조사에서 13명 가운데 2위에 올랐다. 0%에서 두 자리 지지율을 얻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6개월. 선거라곤 해본 적이 없는 비벡 라마스와미가 16일(현지시간) 발표된 ‘라스무센’ 전국 조사에서 13%를 얻으며 쟁쟁한 정치인을 다 돌려세웠다.
론 드센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8%,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 4%, 팀 스콧 상원의원 4%,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2%, 아사 허친슨 전 아칸소 주지사 0%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60%). 지난 10일과 15일 조사에 이어 세 번째 2위. 한때 트럼프의 대안으로 꼽히기도 했던 드센티스를 연속으로 추월했다. 미국이 깜짝 놀라고 있다.
■ 젊은 신인이 보여준 보수주의 정석
한국 정당들은 유독 젊은 피가 필요하다며 청년 가산점, 청년 할당제 등과 같은 특혜를 도입했다. 보수정당이 외연을 넓힌다며 좌파들을 애써 끌어들인다. 미국 정치에는 없는 일. 후보는 본인의 정치이념과 능력으로 선택받는다. 라마스와미도 마찬가지다.
1985년 생. 인도 이민자의 아들(헤일리 전 대사도 인도계. 그들의 약진이 놀랍다). 하버드대 생물학 전공. 예일대 법대 변호사. 헤지 펀드에서 일하다 바이오와 투자회사를 차례로 창립. 포브스 추산 2023년 그의 재산은 6억3천만 달러. 그는 기업의 좌경화와 좌파들의 정체성 정치(정당 등에 기반을 둔 보편정치가 아니라 인종·민족·성별·성 정체성·종교 등 특정집단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배타적 동맹정치)를 비판하는 책을 두 권 펴냈다. 스스로 일군 부자이지만 현실정치 경력은 전혀 없다.
그런 라마스와미가 짧은 시간에 어떻게 전국 정치인이 되었는가? 선명한 이념 정체성. 한마디로 보수주의의 정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념의 일관성이 확실하다.
좌우를 넘나들어야 의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는, 좌우를 아울러야 큰 정치인이라는 정치인들이 많다. 젊은 세대는 사상과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특질이라면서도 좌파 흉내를 내는 이들도 많다. 이념 정체성이 뭣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정치인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사람들은 라마스와미를 눈여겨봐야 한다.
금융·바이오·IT 업계의 상당수가 좌파인 것에 비하면 라마스와미의 보수성은 독특하다. 그는 “미국이 국가 정체성의 위기에 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비판인종 이론을 반대한다. 미국을 휩쓰는 이 이론은 흑백 인종차별을 내세우며 미국 역사와 자본주의, 공권력을 부정한다. 혁명을 통해 새 나라를 세우려 한다. 그는 워커주의(wokism: 문제의식을 가지고 깨어있다는 것), 기후변화주의, 성 이념 등 모든 마르크스주의 논리를 반대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낮은 계층의 시민들에게 더 많은 경제 기회를 주기 때문에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는 해독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세계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블랙락, 벵가드 등 투자회사를 비판한다. “ESG를 추진하며 경제에 정치를 혼합시켰다. 주주들에게 불리한 자산 운용을 해 왔다”는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며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비판한다. “낙태는 살인”이라며 생명을 옹호한다. “‘큰 정부’의 정치도구인 교육부, FBI, 국세청 등을 없애고 연방공무원의 숫자를 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한다.
공화당에는 무늬만 보수라는 ‘라이노(Republican in name only)’나, 좌우 통합 정책을 주장하는 ‘유니파티(Uniparty)’가 많다. 라마스와미는 그들의 이중성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보수주의의 투사’임을 부각하는데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새로운 보수의 우상’이라던 드센티스 지사는 지지도가 한 때 30%를 넘었다. 그러나 라이노, 유니파티들과 연대하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념 정체성 후퇴를 보면서 드센티스를 외면한다. 라마스와미와 크게 대비된다.
■ 오만한 다보스 포럼 응징
라마스와미의 보수주의가 큰 관심을 끈 것은 지난 3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일명 다보스 포럼)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냈을 때다. 영국의 가디언 등 세계 주류언론들은 WEF를 지구를 넘어 ‘우주의 지배자’라 부른다. 그만큼 국제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한다. 그 절대강자를 상대로 라마스와미는 “나를 그 조직의 회원인 것처럼 허위 인식을 조장했다”고 주장했다. “‘2021년 젊은 글로벌 지도자’에 지명하겠다는 포럼의 터무니없는 ‘상’을 명백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포럼은 마음대로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2년 동안 거듭 이름을 지워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클라우제 슈바프가 1992년 만든 세계경제포럼은 목적과 지향점이 분명하다. 단순히 경제 교류를 위한 곳이 아니다. WEF는 50여 년 동안 해마다 스위스 휴양지 다보스에서 정치·경제 거물들을 모아 ‘다보스 포럼’을 연다.
올해도 50명의 각국 정상을 포함해 2,500여명이 모였다. 여기에서 ESG 경영을 주도하는 세계 최대의 미국 투자회사 블랙락의 창립자 래리 핑크는 국가주권과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포퓰리즘 인물·국가들을 비난했다. WEF 이사인 그는 스스로 국경 없는 ‘하나의 세계정부’가 목표인 좌파 글로벌리스트라고 한다. 세계경제포럼은 글로벌주의 이론의 본산이며, 그 확산의 실행조직이다.
세계의 유명인들은 왜 다보스에 모여 드는가? ‘경제’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다보스 포럼에 가는데 수십만 달러가 든다. 기업들은 수백만 달러를 들인다. 포럼은 서구사회를 글로벌주의자들의 소수독점 체제로 완전 탈바꿈시키는 꿈을 꾸는 자들이 만나는 자리다. 세계정부’를 만들려는 좌파 글로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해체를 위한 논의를 하는 곳이다.
세계경제포럼은 기업 파시즘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 정치 독재자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쥐고 전횡하던 파시즘이 아니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이 각국의 정부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파시즘이다. 코비드 때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각국에 백신 사용을 적극 장려하라고 한 것이 좋은 예.
WEF는 “2030년 세계를 위한 8가지 예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도 행복하게 된다”며 “필요한 것은 빌리면 드론이 배달해 준다”고 했다. 사유재산도 사생활보호도 개인 교통수단도 없이 모든 것이 바뀌는 세상이다. 글로벌주의자들이 전체주의·공산주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이른바 ‘거대한 재조정(Great Reset).’ 그래서 포럼은 “아카데미 돈 잔치”이며 세계 지배를 위한 “침묵의 글로벌 쿠테타”로 불린다.
■ 다보스 포럼의 ‘터무니없는 상’
라마스와미는 “터무니없는 상”이라 했다. 하지만 포럼의 ‘상’을 받으려는 정치·기업·법조인들이 세계에 널려있다. 이들은 ‘동창회’까지 구성되어있는 ‘젊은 글로벌 지도자’에 선정되면 “영광”이라며 인터뷰까지 한다. 한국에도 해마다 국회의원, 재벌 2세 기업인, 언론사 대표, 변호사 등 유명인들이 초청을 받았다. 그것을 주요 경력으로 자랑한다.
하지만 보수 정당의 의원이나 공정성이 생명인 언론사 대표 등이 좌파의 본산인 다보스 포럼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석연치 않다. 좌파 이념에 대한 확신 때문인가? 대한민국의 국경과 주권, 정체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념의 무지에 따른 멋 부리기인가? 현재 포럼의 ‘동창회 명단’에는 유수한 재벌 2세 기업인 등 한국인 7명이 등재되어 있다.
1997년 하버드대의 저명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이 ‘다보스 남자들’이라 부르며, “이 엘리트 집단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충성이 필요 없다, 국경을 사라져야 할 장애물로 여긴다. 민족 정부를 과거 잔재로 여긴다. 정부는 엘리트들의 글로벌 운영을 편케 만드는 기능만 하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 ‘다보스 남자’ ‘다보스 문화인’들이 바로 세계경제포럼의 ‘전략 파트너’라는 핵심 인물 100명. 그야말로 진성 좌파 경제인들이다. 그 좌장이 블랙락의 핑크. 한국의 재벌회장 1명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라마스와미의 주장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포럼의 가치들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하게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글로벌주의 기관’들에 반대하고 미국의 주권을 지키려는 사람들 중 한명이다. 글로벌 ‘형평’을 이루려는 WEF는 미국인들에 중대한 위협이다. ‘이해 관계자 자본주의’와 ‘거대한 재조정’ 등 각종 반자본주의 의제를 밀어붙이는 ‘늙은 괴물’이기 때문이다.” 다보스에 가는 한국인들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기 때문인가?
결국 라마스와미는 7월 말, 소송에서 이겼다. ‘우주의 지배자’ 다보스 포럼이 풋내기 보수 정치인에게 완전 무릎을 꿇었다. 허락 없이 이름을 올린 것은 실수라고 사과했다. 앞으로 그런 잘못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부 변화를 이루겠다고 약속했다. 라마스와미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며 합의금을 주었다.
라마스와미는 승소 후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줏대를 가진 지도자들”이라며 합의금 전부를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연구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 연구소가 포럼이 추구하는 ‘거대한 재조정’ 등에 가장 반대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곳이기 때문.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는 1월 트위터에 “세계경제포럼이 세계를 통제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올렸다. 단 하루만에 240만 명이 참여해 86%가 “아니오”라고 했다. 이런 강한 반감이 포럼을 응징한 라마스와미의 지지율을 높였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보수주의 줏대’가 미국 유권자들에 먹힌 것이다.
다보스 포럼은 한국인들에게 인기다. 재벌만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등 여러 대통령, 장관들도 갔다. 포럼의 이념과 실체를 잘 알고 갔는지 궁금하다. 좌파 대통령이 아니라면 라마스와미의 반대와 같은 의견이 큰 공감을 얻고 있음을 알고 가야 한다. 그래야 국제정치의 들러리가 되지 않는다.
[손태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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