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사회주의’인 ‘자유주의’에 속지 말라고 일찍이 경고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위키백과 캡처 |
‘어머니’는 ‘정자를 주입받은 사람.’ ‘아버지’는 ‘자연 발생 부모.’ ‘남성’은 ‘사람.’
농담이나 풍자가 아니다. 최근 미국 위스콘신주 주지사(민주당)는 새 법안에서 이렇게 바꾸겠다 했다. 그는 ‘어머니’ 같은 남녀를 구별하는 언어를 없애야 동성애·성전환 자유와 진정한 인간 평등이 이뤄진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자.
■일찍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좌파들의 그런 상징조작·언어유희와 좌파의 본질에 관해 정곡을 찔렀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또는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부른다. 바로 그들이 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좌파들의 위선·허위의식·교활함을 잘 비꼰 표현은 없을 것이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도 “사회주의자들의 언어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미국 좌파들은 단어 변형으로 국민을 헷갈리게 만들어 정치 목적을 달성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언어 변화가 사람의 생각·감정을 바꿀 수 있음을 일찍이 간파했다. 이념 투쟁·정치 투쟁 승리는 언어 조작에서 시작됨을 깨달았다.
상대를 ‘악마’로 만드는 대신 자신은 ‘선’으로 위장·변장했다. 본질을 감춘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해 대중에게 호소했다. 그런 단어가 수두룩하다.
그들은 승리했다. 그들이 왜곡한 정치·경제 용어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소련이 망했는데 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가 여전히 전 세계를 휩쓰는가? 왜 많은 사람이 그런 이념에 환상을 가지는가?
한국 등 세계의 보수우파들이 좌파 언어에 세뇌당한 탓이 크다. 그래서 좌파 이념·정책을 좌파로 보지 못한다. 오히려 보수주의로 착각·혼동한다.
그 대표 단어가 한국에서 ‘자유주의’로 번역되는 ‘리버럴리즘(Liberalism)’이다. 학력을 속인 노동을 뜻하는 ‘위장 취업’이란 말처럼 ‘리버럴리즘’은 마르크스주의 등 본질을 감추기 위한 ‘위장 정치 용어.’ 원래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른 좌파 이념이다. ‘진보주의(Progressivism)’도 마찬가지.
최근 캐나다 총리가 바뀌었다. 전임 저스틴 트뤼도·새 총리 모두 ‘리버럴당’ 출신. 미국·유럽 좌파 매체도 그것을 ‘좌파’라 규정한다. 그러나 ‘자유당’이라 번역되니 한국인들은 그들이 좌파인 줄 모르기에 십상이다. 캐나다 정권이 좌파라면 의아해한다.
“미국에 무슨 좌파가 있느냐?”라는 것도 마찬가지. 미국은 사회주의자 등을 ‘리버럴리스트’라 통칭한다. ‘자유주의자’라 번역하니 정체를 잘 알 수 없다. 미국은 좌파가 없는 곳으로 오해하게 된다.
■‘리버럴리즘’은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가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를 거쳐 태어났다. 겉은 ‘자유’나 속에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가 다 들어있다. 교묘하게 자본주의의 요소를 약간 넣어 변장했을 뿐이다. 단순한 언어 바뀜이 아니다. 역사·정치의 변혁을 노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작심하고 만든 위장의 역작(?). 대통령 등 정치인들이 오랜 노력으로 고착시켰다.
그래서 한국에서 ‘리버럴리즘’을 ‘자유주의’라고만 옮겨서 안 된다. 그렇게만 알아서는 더 안 된다. ‘자유!’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역사 배경을 모르는 단순 번역은 사람들이 단어의 매력에 끌려 자본주의 파괴가 목적인 ‘자유주의자’가 되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본질인 ‘보수주의’를 경멸하며 ‘보수주의자’임을 부끄러워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의 위장 단어”라는 설명을 붙여 실제 좌파 이념임을 바로 알도록 해야 한다.
20세기 초. 미국에는 러시아 유혈 혁명과 소련의 레닌·스탈린 공산 독재체제 때문에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다. 누구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로 지목되는 것은 치명타. 좌파는 마르크스주의 계급 투쟁이 극단급진주의로 불림을 피하려 했다. 국민을 설득해 동조자로 만들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가 정치 언어를 왜곡해 대중의 인식을 바꾼다”고 가르쳤다. 위기에 몰린 좌파들은 거꾸로 부르주아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언어 짜 맞추기’에 나섰다.
‘공산주의·사회주의’ 대신 ‘진보주의’라는 그럴싸한 위장 용어를 발명했다. ‘보수’를 ‘악마’로 만든 뒤 ‘진보’라는 새로운 ‘선’을 조작했다. 이념 전쟁을 위한 선전·선동의 시작이었다. 단어만 놓고 보면 진보 역시 자유 못지않게 매력 있다.
■‘진보’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나 ‘진보주의’는 반자본주의다. 핵심 목표는 자본주의 타파나 근본 변형, 더 큰 정부·더 많은 국가 통제였다. 1890년대~1920년대 큰 세력을 형성했던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경제 불평등이 자본주의에 내재한 불공정성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해결을 위해 기업 규제·최저임금법 제정·산업재해 보험 제공 등 대규모 정부 개입·국가 통제가 필요하다 주장했다.
유럽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진보는 급진 혁명 대신 ‘점진 개혁’으로 포장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린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주장하지 않으므로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다”고 했다. 자본주의에 사회주의 요소를 도입할 뿐이라고 강변했다. 말장난의 지식놀이. ‘사회주의’ 이름을 피하면서 실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미국 상원에서 극좌라는 버니 샌더스는 자신의 정책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 사회주의,’ ‘진보 정책’이라 부른다. 저명 진보주의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우드로 윌슨 대통령.
‘민족자결주의’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윌슨이 좌파라니 믿기 어려울지 모른다. 윌슨은 진보주의 정부 개념이 사회주의 개념과 매우 비슷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했으나 이념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다. ‘엘리트주의자’라 하층 계층인 사회주의자들을 낮게 평가하며 잡동사니 집합체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게 ‘진보주의’ 위장막으론 모자랐다. 좌파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컸다. 이번엔 ‘리버럴리즘’을 들고 나왔다. 뜬금없는 변형.
20세기 초.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소련의 혁명 마르크스주의 성취에 감탄했다. 미국인들에게 ‘경제 자유를 포기하라. 개인주의 전통을 버려라. 공공의 필요가 개인 재산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새로운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자신의 철학을 ‘실용주의’라 했다. 자신의 이념을 자본주의 성향이나 중립으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사회 개혁의 도구로 보며 사회 평등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자. 듀이 같은 학자들이 ‘자유주의’를 내걸면서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가 변장한 ‘자유주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자유주의 즉 ‘리버럴리즘’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와는 정반대 사상. 17세기~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제한된 작은 정부, 자유 시장, 법의 지배, 사유 재산을 강조했다. 현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좌파들은 그 ‘자유주의’ 네 글자만 베껴 뜻은 전혀 다른 그들만의 ‘자유주의’를 만들었다. 그리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화해다. 사회주의 정책을 일부 채택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끈질긴 선전·세뇌 운동을 벌였다.
1930년대~196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정책 모두 사회주의가 바탕인 사회 복지·자본주의 규제·민권 확대·공공사업 도입 등을 추진했다. 두 대통령은 정치 반발을 피하려 듀이처럼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로 포장했다.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에 대한 사회주의 꼬리표를 거부했다. 자유주의를 정부 주도의 경제 개입으로 재정의하며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한 필수 개혁이 자유주의”라 했다.
그러나 레이건과 원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루스벨트의 자유주의를 ‘위장 사회주의’라고 반박했다. 레이건은 “오늘날 '자유주의'라는 단어는 18세기 건국 아버지들이 이해한 방식과는 반대”라고 지적했다.
■마침내 17세기 본래 ‘자유주의’는 20세기 좌파들에게 본명을 뺏겼다. ‘고전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로 바뀌고 말았다. 존 로크, 아담 스미스 같은 사상가들은 원래 그냥 ‘자유주의자’였다. 이제 ‘고전 자유주의자’라 불린다.
사회주의를 자유주의로 변장·위장해 원래 용어를 밀어낸 것은 좌파들의 놀라운 언어 조작 능력·추진력을 상징한다. 그 위장 단어는 확실하게 정착했다. 오래전부터 보수우파조차 그들을 ‘좌파’ 외에 ‘리버럴리스트’라 부를 정도. 사상전쟁에서 보수우파는 졌다.
“변장한 좌파 이념”인 오늘날 ‘자유주의’는 ‘고전 자유주의’와 반대로 개인의 권리·책임이 아니라 집단 권리와 집단 정체성을 지지한다.
증세로 지나친 복지 국가 운영. 인간 생활 거의 모든 면을 정부가 감독. 자유 시장을 통한 재산 창출이 아니라 복지 국가를 위한 징벌 세금과 재산 재분배 목표. 법의 지배가 아니라 의회·정부 등의 입법권을 판사들이 대신 행사하는 사법 행동주의 선호.
고전 자유주의에서 ‘평등’은 법 앞에 평등·기회의 평등이다. 좌파 자유주의자들은 평등을 ‘형평’으로 바꾸어 결과의 평등을 강조한다. 더 많은 정부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고전 자유주의’와는 달리 반대 의견을 관용하지 않는다. 집단 사고 선호. 자신들 과학만 과학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면 반역으로 여긴다. 진화론, 기후 위기론,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비판을 막는다.
■‘위장 사회주의’인 자유주의 등장에 따라 용어도 변했다. 의도된 “부드러운 표현”으로 국민을 속이기 위한 목적. ‘복지’는 ‘사회 정의,’ ‘노동자 통제’는 ‘경제 정의,’ ‘계획 경제’는 ‘공정한 규제,’ ‘사회주의 의료’는 ‘보편 의료,’ ‘사회주의’는 ‘규제된 자본주의,’ ‘큰 정부’는 ‘공공 서비스’로 바뀌었다.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정부 통제를 국민을 위한 정부의 도덕 의무라고 정당화했다. ‘세금 인상’을 ‘공정하게 우리 몫을 낸다’고 표현해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돈을 가져가는 현실을 숨기고 마치 개인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들리게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비판 이론’·‘문화 비판’으로 재구성됐다.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지 않고도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공격을 하려는 의도.
좌파들은 정치 용어 등을 내키는 대로 바꾸고도 사람들 의식 세뇌에 성공했다. ‘진보주의’ ‘자유주의’가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임을 잘 모르도록 만들었다. 세계 좌파들의 오랜 행태며 능력. 제대로 알아야 더는 속지 않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중도 보수정당’도 내키는 대로 붙인 이름. 속으면 안 된다.
[손태규 시장경제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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